빛나는 가야 역사. 다라국을 만나다.

전시내용

민속유물

민속유물

조상의 얼이 담기 민속유물을 역사실 입구에 전시해 놓아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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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는 합천

한눈에 보는 합천

합천의 유적지 및 문화재와 관광지 등을 영상과 모형을 통해 볼 수 있게 꾸민 공간으로 합천의 문화유적지, 관광지와 문화재 등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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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대야성 전투

삼국시대 대야성 전투

대야성은 삼국시대 백제와의 접경지대인 신라 서부 지방의 요새지로서 642년 백제장군 윤충의 공격으로 함락된 적이 있고 이때에 도독 김품석과 그 부인(김춘추의 딸)도 죽어 이로 인해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역사적 현장이다. 이후 후백제와 신라, 고려 등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접전을 벌이기도 했다. 해발 90m의 취적산 정상부 가까운 곳에 토석 혼축한 석벽이 일부 잔존하며 강쪽은 자연시세를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의 길이는 30m 정도이며 질도기 파편과 와편이 채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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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 정인홍

산림(山林)으로서 선조·광해군 대에 북인·조식학파(曺植學派)를 이끌며 정국을 주도했다.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萊菴). 최영경(崔永慶)·오건(吳健)·김우옹(金宇顒) 등과 함께 조식에게 수학하고 그의 수제자로서 학통을 이어받았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과거를 포기했다. 1573년(선조 6) 김우옹의 천거로 처음으로 관직에 나가 황간현감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고 1581년 장령이 되었으나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를 축으로 한 서인계에 밀려 1584년에 낙향했다.

남명과 내암

1589년 기축옥사로 최영경·이발(李潑) 등 조식학파가 탄압을 받으면서 이황학파와 결별하고 북인을 형성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문 수학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 등과 함께 성주·고령·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격퇴, 경상우도를 방어했으며, 이를 계기로 조식학파는 경상우도에서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구축하고 중앙정계로 복귀하게 되었다. 1602년 대사헌을 제수 받았으나 기축옥사를 일으켰던 서인과 이를 방관했던 남인을 배제하고자 이들과 치열히 다투다가 수개월 후 낙향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산림으로서 영향력만 행사했다. 1608년 영창대군과 광해군을 둘러싼 후사문제로 북인이 대북·소북으로 대립하게 되자,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했다가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이듬해 영변에 유배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유배가 풀린 후 이이첨(李爾瞻)·이산해(李山海) 등 대북의 정권 주도를 지원하고 대북의 고문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후 조식과 조식학파의 학문적 위상 강화작업을 활발히 추진하여 조식의 문묘종사를 추진하는 한편,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학문을 비판하고 이들의 문묘종사를 저지했다. 이 일로 8도의 유생들에게 탄핵을 받고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되는 등 큰 파문을 일으켰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을 지원하는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주장했으나 영창대군의 축출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논란을 일으키는 가운데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사임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서인에게로 넘어간 후 광해군 정권의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

남명 조식(1501~1572)

남명과 내암

1501년 경상도 삼가현(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의 토골(兎洞)에서 태어나 4∼7세 사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으며, 20대 중반까지 주로 서울에 거주하였다. 26세 때 부친상을 당해 고향 삼가로 돌아가 3년 상을 마친 뒤, 30세 되던 해 어머니를 모시고 김해 탄동(炭洞)에 있는 처가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독서에 힘쓰며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되자 어머니를 설득, 과거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연구와 덕성함양에 전념하였다. 45세가 되던 1545년(명종 1)의 을사사화로 이림·송인수·성우·곽순 등 가까운 지인들이 화를 입게 되자 세상을 탄식하고 더욱 숨을 뜻을 굳혔으며, 마침 모친상을 당함에 삼가로 돌아가 시묘살이를 하였고, 상복을 벗은 후에 김해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토골에 계부당(鷄伏堂)·뇌룡사(雷龍舍)를 지어 문인들과 함께 도학을 강론하였다. 이 시기 제자들이 문하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1554년 55세 때 단성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유명한 단성현감 사직소를 올려 척신정치의 폐단과 비리를 통절히 비판하면서 임금이 크게 분발하여 명신(明新)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당대 사림의 훈척공격에 모범을 보인 것이라 하여 조야에 명성을 크게 드러내게 되고 후세까지 길이 칭송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정인홍·하응도·하항·박제현 등 그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수업받기 시작하였다.

61세 때인 1561년 덕산(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의 사륜동으로 거처를 다시 옮기고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강학하자, 진주·산청·함양·거창 등의 인근지역은 물론 서울의 선비들까지 그를 좇아 몰려들었는데, 바로 그들이 정탁·김효원·최영경·김우옹·이정·김면·조원 등이었고, 정구·최황·곽재우·성여신 등은 이들보다 조금 늦게 문하로 들어왔다. 68세 때인 1568년에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에서는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을 펴 서리의 작폐를 근절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등 나라 정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사후 바로 대사간에 추증되고 1615년(광해군 7) 영의정으로 증직되었으며, 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1604년(선조 37)에 처음 간행된 ≪남명집≫과 ≪남명학기유편 南冥學記類編≫·≪신명사도 神明舍圖≫·≪파한잡기 破閑雜記≫가 있으며, 문학작품으로 『남명가』『권선지로가 勸善指路歌』가 전한다. 1615년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합천의 향교와 서원

향교

 향교와 서원

합천의 향교는 모두 조선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유형문화재 또는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야로면의 합천향교, 초계면의 초계향교, 삼가면의 삼가향교는 당시 군현마다 하나의 향교를 설치한다는 원칙에 따라 군의 치소(治所)와 현의 치소(治所)에 설치하였다. 합천향교는 원래 합천군 소재지에 창건되었으나 1881년(고종 18) 수해를 입어 합천군청을 야로면으로 이전할 당시 야로면 구정리로 옮겨 세웠다가 1893년 군청이 합천읍으로 다시 옮겨갈 때 향교는 그대로 야로면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이에 합천, 용주, 율곡, 대양의 유림들이 군 소재지에서 공자 및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965년 강양향교를 건립하였다. 이 향교는 현재 전국 232개 소 향교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지어진 향교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8호인 합천향교는 조선 세종 때 합천의 유림이 향리 자제들의 교육을 위하여 건립한 향교이다. 향교의 배치는 정문인 영귀루(詠歸樓)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을, 왼쪽에 문묘인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가 있어 강학(講學)공간과 제향(祭享)공간이 병렬로 배치되어 있다. 강학 공간에 기숙 시설이라 할 수 있는 동재(東齋)·서재(西齋)가 없는데, 이것은 아마도 옮겨 세우면서 배치가 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초계향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처음 세워진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체로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향교는 임진왜란 전란 중에 소실된 것을 1628년(인조 6)에 중건하였다. 정문인 풍화루(風化樓)의 뒤로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9호인 삼가향교는 조선 세종 때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1502년(중종 15)에 명륜당 등을 확장 보수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2년(광해군 4)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경사면에 조성하여 앞쪽 낮은 터에는 정문인 풍화루와 그 뒤로 명륜당을, 뒤쪽 높은 터에는 대성전을 배치하여 초계향교와 마찬가지로 전학후묘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다.

서원

합천지역의 서원은 봉산면 옥계서원, 대병면 송호서원, 율곡면 청계서원, 쌍책면 옥전서원, 청덕면 덕원서원 등이 있다. 그리고 남명 조식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따르고 추모하기 위해 세운 용암서원이 최근에 복원되었다.

 향교서원 자료 향교서원 자료

용암서원은 원래 삼가에 회산서원으로 세워졌는데, 왜적의 침입으로 훼손되자 1603년(선조 36) 향천으로 옮겨 향천서원으로 건립하였고 1609년 사액서원이 되면서 용암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으며 1987년 합천댐이 조성되면서 그 터도 수몰되었다. 그 후 2007년 4월 25일 합천군에서 삼가면 뇌룡정 옆에 터를 마련하여 복원하였다. 옥계서원은 1725년(영조 3)에 율곡 이이 선생이 손수 쓴 격몽요결(擊蒙要訣)과 해동연원록(海東淵源錄) 등을 보관하고자 세워졌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린 것을 1867년(고종 4) 장소를 옮겨 다시 지었다. 그 후 합천댐 수몰지역으로 되어 1986년 다시 건물을 옮겨 복원하였다.

이 서원은 율곡 이이를 비롯하여 윤병계, 최두남, 위백규, 박준흠, 최유윤 등 여러 인물을 배향하고 있다. 송호서원은 고려 의종, 명종 때의 문신으로 문무겸직의 시초가 된 충숙공 문극겸 선생을 봉향하는 곳이다. 1777년(정조 1) 삼가현 역평에 창건되었다가 1871년(고종 7) 철거되었고 다시 1957년 복원되었다. 합천댐 건설로 수몰되게 되면서 1985년 옮겨 복원하였다.

청계서원은 1564년(명종 19) 지방 유림들의 공의로 조선 명종 때의 학자 황강 이희안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고, 이후 임진왜란 때 초계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전치원, 이대기 선생을 함께 배향하고 있는 서원이다.

옥전서원은 1799년(정조 23) 초계 유림들이 발의하여 1807년(순조 7)에 옥산사를 건립하여 고려 전기의 학자이자 초계 정씨 시조인 정배걸 선생을 향사한 데서 비롯되었다. 1872년(고종 8) 옥산사가 철폐된 뒤 후손들이 봉향하다가 1981년 유림에서 정배걸 선생이 강학하던 곳에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덕원서원은 고려 말 유학자 문절공 운암 차원부 선생과 조선 세조 때 공신 쌍청당 차운혁 선생을 배향한 곳으로 처음에 호남 승평에 세워 오천서원(鰲川書院)이라 했으나, 그 후 유림에 의하여 1806년(순조 6)에 이건하여 덕원서원이라 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따라 자진 철폐하였다가 1902년(광무 6)에 유림이 다시 개수 복원하였다.

합천의 고가(古家)

묵와고가

묵와고가는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 있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목조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선조 때 선전관을 지내고 인조 때 영국원종 일등공신으로 책록된 윤사성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 집터가 600평이 넘고 한때는 8채나 되는 집이 들어찼다고 전해진다.

이 집은 파리장서에 서명했던 항일독립운동가 윤중수(윤사성의 10대손)가 살았던 유서 깊은 고택이다.

호연정

호연정은 합천군 율곡면 문림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로서 1981년 12월 21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선조 때 주이(1515~1564)가 예안현감을 사직한 뒤 이곳에 정착하면서 이 정자를 지어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고 전해진다.

본래의 정자는 임진왜란 때 불탔고, 그 뒤 후손들이 주이를 기리기 위해 다시 지었는데「호연정중수기」에 있는 숭정연호로 미루어 보면 인조가 재위할 무렵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합천의 사찰과 절터

합천의 사찰은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곳이 11개소, 폐사된 절터가 49개소이다. 사찰 11개소 중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가야면 치인리의 해인사와 가야면 황산리의 청량사를 제외하면 나머지 9개소는 모두 해인사에 소속된 암자이다. 해인사의 암자 가운데 원당암은 남아 있는 유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홍제암, 지족암, 백련암, 국일암은 조선시대, 삼선암, 희랑대, 약수암, 용탑선원은 근대에 조성되었다.

합천에 전해지는 절터로는 합천읍 3개소, 봉산면 3개소, 묘산면 2개소, 가야면 12개소, 야로면 3개소, 대양면 1개소, 율곡면 1개소, 쌍책면 1개소, 청덕면 3개소, 적중면 2개소, 쌍백면 3개소, 삼가면 2개소, 가회면 4개소, 대병면 5개소, 용주면 4개소 등이다.

관람시간
지역 절터
합천읍 외곡리사지(현재 화엄사), 용계리사지, 안계사지
봉산면 명덕사지, 지곡사지, 영각사지
묘산면 팔심리사지, 신락사지
가야면 거덕사지, 칠불암지, 가야산 폐사지 1, 가야산 폐사지 2, 중봉암지, 내원암지, 지모암지, 대성암지, 극락암지, 소리암지, 태평암지, 반야사지
야로면 석수암지, 월광사지, 하빈리사지
대양면 백암리사지
율곡면 갑산사지
쌍책면 진정리사지
청덕면 삼학리사지, 두곡리사지, 앙진리사지
적중면 죽고리사지, 미타사지
쌍백면 죽전리사지, 금정사지, 금곡사지
삼가면 문송리사지, 봉두사지
가회면 묵방사지, 영암사지(사적 제131호), 안정사지, 몽계사지
대병면 대지리사지, 상천리사지, 쌍암사지, 청강사지, 허굴사지
용주면 관음사지, 우곡리사지, 용문사지, 팔산리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