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가야 역사. 다라국을 만나다.

선사시대와 가야시대

陜川의 지명유래

합천은『삼국사기』권34 잡지(雜誌) 강양군조(江陽郡條)에 의하면 통일이전 신라 시기에는 대량주군(大良〔耶〕州郡)으로 불리었다. 후기 가야연맹체체 내에서 가장 큰 고을이라는 뜻으로 대야주라 불렀기 때문이다. 신라가 대가야를 합병한 후에도 지명을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이곳에 도독부를 두어 백제를 견제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후 경덕왕 때(757)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황강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라는 이유로 강양군(江陽郡)이라 지칭했다.
합천은 고려시대에는 합주(陜州)로 불리었다. 고려 현종 2년(1018),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합주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현종이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있을 때 진외가(그의 할머니 신성왕후〔神成王后〕김씨의 고향)인 이 지역을 높이 평가하여 강양군을 합주로 승격시켰다고 전한다.

그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종 13년(1413)의 행정구역 개편시, 주(州)가 군(郡)으로 강등되면서 ‘협천(陜川)’이 되었는데, 협천은 좁은 내라는 뜻으로 이 지역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좁은 계곡이 많다는 뜻이다.
그러나 1914년 3월,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분지를 이루고 있는 초계(草溪)와 삼가(三嘉)가 합천군으로 편입되면서 좁은 계곡 또는 좁은 내라는 뜻이 맞지 않는다 하여 ‘세 개의 고을이 합하여 이루어진 곳’인 ‘합천’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한자식 표기방법은 그대로 존속하지만, 말할 때와 읽을 때는 ‘합천’이라고 하게 되었다.

구석기시대

합천지역은 그 동안 구석기시대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활동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구석기시대 유적의 존재가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정밀조사를 통해 유적의 존재가 확인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합천과 바로 인접한 거창군 남하면 임불리에서 중석기시대 것으로 보이는 문화층이 발굴조사되었는데 세석핵(細石核)과 돌날 등이 다수 채집되었기 때문이다.
임불리 유적을 근거로 볼 때 합천 및 그 인근 지역에서는 무토기(無土器)의 세석기 전통을 유지하는 중석기시대 문화가 존재할 가능성은 아주 높다.

신석기시대

봉계리 신석기 주거지

유물·유적의 존재를 통하여 선사시대의 합천문화를 제대로 복원해 볼 수 있는 시기는 신 석기시대부터이다. 신석기시대에는 어로가 큰 비중을 차지하여 신석기인들은 주로 물가에 살았다. 그에 따라 신석기시대 유적들은 해안이나 큰 강변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그래서 합천지역과 같이 산악이 많고 내륙에 속하는 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의 발견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희박할 것이라고 믿어왔었고 신석기시대 유적의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대에는 신석기시대에 인간이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되기도 했다. 그러나 합천댐 수몰지구에 대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두 곳에서 신석기시대 취락지가 발굴조사 되었고 그밖에도 몇 군데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채집되었기 때문에 황강유역에서도 신석기시대인들이 적응하여 살았음이 밝혀졌다.

덕유산을 수원으로 하는 황강은 거창군 남하면에서 합천군 대병면까지 산간협곡을 통과 하는데 유적은 산간협곡지대 안의 소규모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합천군 봉산면 봉계리 유적과 거창군 남하면 임불리 유적 등은 내륙산간 지대에서 발견된 최초의 신석기시대 주거유적일 뿐만 아니라 남한지역에서 발견된 몇 차례 되지 않은 신석기시대 취락지로서 그 의의가 크다.

봉계리 추로 돌도끼

합천군 봉산면 봉계리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13기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서로 시기가 다른 다양한 토기편과 함께 혈암(頁岩:셰일)제 및 화강암제 뗀석기 다수, 갈돌, 숫돌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고 특기할 만한 유물은 흙으로 만든 방추차(紡錘車), 어망추(魚網錘) 등을 들 수 있다. 그밖에도 9호 주거지의 저장고에서는 탄화된 호두와 도토리가 발견되어 당시의 식용식물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주었다.임불리 유적은 당초 천덕사지(天德寺址)를 발굴조사를 하던 중 역사시대 문화층 아래에서 아주 이른 시기의 신석기문화층과 아울러 중석기시대에 속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석기문화 복합체가 발견되었다. 이 임불리 유적에서는 융기문 토기가 채집되어 가장 내륙지방에서 발견된 사례에 속하게 되었고, 아울러 황강유역의 초기 신석기문화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 셈이 되었다.

그보다는 비교적 정형성 있게 제작된 세석기들은 중석기시대에 속할 것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고 후기구석기시대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 볼 수도 있게 되었다.

합천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황강유역은 일면 한반도 내에서도 후기구석기시대를 계승한 중석기시대로부터 초기 신석기시대를 거쳐 후기 신석기-청동기시대 교체기에 이르기까지 신석기시대의 전체적 문화양상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지역 중의 하나이다.

청동기시대

합천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의 존재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합천지역은 평지가 매우 좁고 대부분이 산지 및 경사지에 해당하여 농경에 적합하다고 볼 수 없다. 청동기시대인들에게 합천지역은 인구가 집중되고 집약적인 농경을 시도할 만한 지형적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 청동기시대인들이 남긴 유적은 취락지와 분묘유적으로 지석묘군이 합천 일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합천군 일대의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지표조사를 통하여 적중면 부수리 지석묘군과 덕곡면 학리지석묘군이 발견되었고, 합천댐 수몰지역의 봉산면 저포리 E지구지석묘와 주거지, 봉계리 지석묘와 주거지, 합천읍 영창리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발굴조사되었다.

그런데 합천지역에서는 북한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매우 이른 시기의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현지까지 가장 이른 시기의 민무늬토기유적은 봉산면 저포리 E지구 주거지와 봉산면 봉계리 주거지이다.

저포리 E지구 주거지

저포리 E지구 주거지 유적에서는 모두 7기의 청동기시대 수혈식주거지가 조사되었다. 대부분 장방형의 평면형을 보이고 주거지내의 시설물로는 벽구(壁溝)시설 외에 원형의 수혈저장공과 노지(爐址) 시설이 있고 출입시설은 발견되지 않았다. 출토유물은 토기, 석기, 토제어망추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대체로 한강유역에서 발견되는 공렬토기문화 단계에 속하는 것이다.
봉계리유적에서는 3기의 주거지와 3기의 적석유구가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원형, 말각방형, 부정형 등으로 저포리와는 큰 차이가 있다. 출토유물은 석기와 토기류가 있다. 봉계리 주거지는 저포리 주거지보다 약간 늦은 시기로 편년될 수 있다.

영창리 환호 한편 합천읍 영창리유적은 삼한시대 전기 원형점토대토기(圓形粘土帶土器)가 사용되던 시기의 유적이다. 이 유적 주거지의 특징은 구릉 정상부에 있는 평탄한 땅을 공동작업이나 마을의 의례를 위한 장소로 사용하면서 그곳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주거지가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거지를 중심으로 한 네 방향 중에 세 방향은 지형이 험하여 별도의 방어시설을 갖추지 않았고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고 사람의 왕래가 쉬운 남쪽에는 구(溝)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청동기시대의 환호취락(環濠聚落)처럼 마을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영창리 동검 동촉 노출 이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보통 무덤에서 출토되는 한국식동검(韓國式銅劍, 細形銅劍)이 구릉 경사면의 수혈에서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유례가 없는 일로서, 본 유적의 발굴을 통해 한국식동검이 무덤이 아닌 생활유적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지금까지 무덤 출토품으로 알려져 있던 동검들 역시 출토 유구에 대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게 되었다. 동검의 형태나 출토상태로 보아 이 수혈은 아마도 당시의 의식(儀式)과 관련된 제사유구로 추정된다.

합천군 일대의 지석묘군들은 수적으로 볼 때 많은 수는 아니다. 대개 강변 저지대와 낮은 경사지에 5~6기에서 수십여 기 정도가 군집을 이루어 존재한다.
저포리 유적에서는 총 8기의 지석묘가 조사되었다. 저포리 지석묘는 구조적인 면에서 지상식과 지하식이 있고 출토된 유물은 무문토기, 단도마연토기, 석기류 등이 있는데, 이 중 무문토기는 기형(器形) 파악이 가능한 것이 없다. 단도마연토기는 두 가지 유형의 것이 출토되었다. 석기류는 마제석검과 석촉류가 다양한 형태로 출토되었다.
저포리 지석묘군은 모두 남방식이면서 개석식에 속하는데 개석식 중에도 이른 시기에 속하는 8호 지석묘는 지하식이고 유물 상으로도 약간 늦은 시기에 속하는 5호 지석묘는 지상식이어서 지석묘의 세부적인 변천과정을 알 수 있게 한다. 대체로 저포리의 이른 시기 지석묘는 E지구 주거지와 거의 같은 시기이거나 약간 늦은 시기에 해당하고 늦은 시기 지석묘는 그 이후 시기에 해당되리라 생각된다.

저포E지구 지석묘 덕포면 할리지석묘군

그밖에 황강유역에서 발견된 지석묘군 중 대병면 역평리 지석묘군이 조사 되었고 봉계리에 있는 1기의 지석묘가 발굴되었으며 거창군 남하면 대야리와 산포부락 일대에서는 30~40여 기의 지석묘가 조사되었다.
합천지역 특히 황강유역의 청동기시대의 문화흐름은 전기무문토기에 속하는 저포리 E지구 주거지와 봉계리 주거지에서 중기무문토기 문화기에 속하는 대야리 주거지로 변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각 문화에 속하는 지석묘군은 저포리 8호 지석묘나 역평리 나 지구 2호 지석묘가 이른 시기에 속하고 늦은 시기의 지석묘는 저포리 5호 지석묘나 남하면 지석묘들이 해당될 것으로 판단된다. 합천지역의 청동유물은 현재까지의 자료로 보는 한 송국리형 문화단계의 늦은 시점에 유입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는데 율곡면 임북리에서 지표채집된 세형동검의 존재는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가야시대

합천지역의 곳곳에는 작은 세력집단의 존재를 알려주는 고분군이 분포하지만 이들이 독립적인 세력집단은 아닌 듯하다. 이들 소규모 고분군들은 합천분지의 중심에 자리 잡은 지배자집단의 고분군에 종속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당시 합천지역에는 몇 개의 촌락을 거느린 소국, 즉 가야제국 중의 한 국가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가야국은 주변의 다른 가야국들과 대립하거나 신라 혹은 백제와 교섭하면서 그 세력을 성장시키다가 결국 신라의 정복으로 그 지방통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합천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관계로 양 세력의 각축장이 된다.

합천지역의 고분군은 크게 5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분포한다. 이것은 합천의 가야국이 5개의 촌락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들 집단 중에서 중심이 되는 고분군의 무리는 현재까지의 발굴조사 자료로 보는 한 쌍책면 일대의 고분군들에 해당하고 그 중에서도 옥전 고분군이 합천 일대의 지배자 집단의 묘역일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 고분군이 밀집되고 규모가 큰 것들이 분포하는 지역은 삼가면 일대에 해당되고 그밖에 현재의 합천읍 일대의 지역, 봉산면-대병면-가회면 일대의 지역, 야로면-묘산면 일대의 지역에도 각각 고분군이 모여 있다. 이들 각 지역구의 고분군들 중에서 발굴조사 되어 성격이 자세히 밝혀진 고분군은 얼마되지 않는데 옥전 고분군과 봉산면-대병면 일대의 봉계리 고분군, 저포리 고분군, 창리 고분군, 삼가면 일대의 삼가 고분군 등이 그것이다.

옥전고분군(玉田古墳群)

쌍책면 성산리 옥전고분군 경남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옥전마을에 있는 가야시대의 고분유적으로 사적 제326호이다. 이 유적은 황강변의 해발 50~80m에 달하는 야산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유구는 몇 개의 능선에 나누어져서 넓게 분포하고 있는데, 대다수는 봉토가 남아 있지 않아서 외형상 확인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특이하게 한 지역에는 지름 20~30m의 고총고분이 27기 군집하고 있으며 고분의 총 수는 약 1,000기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 유적은 1985년 여름 경상대학교 박물관의 황강변 정밀지표조사과정에서 다량의 토기와 갑주, 금동제품편이 채집됨으로써 그 중요성이 인식되고 그 해 겨울 1차 발굴조사를 필두로 1987년 겨울, 1989년 봄에 걸쳐 3차의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1991년 여름부터 1992년 봄에 걸쳐 4, 5차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고분은 모두 146기인데, 특히 수혈식석곽묘 중에는 같은 대형이면서도 거대한 봉분이 남아 있는 것과 봉분이 깎여나가 전혀 흔적이 없는 것이 있으며, 또 소형은 측벽의 축조가 아주 정연함에 비하여 대형은 극히 무질서해 보이는 특이함이 엿보인다.

유물은 토기를 비롯하여 철제의 갑주, 화살촉, 대도 등의 무구와 등자, 재갈, 안교, 말투구 등의 마구, 금제이식, 비취곡옥과 유리구슬로 만들어진 목걸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자료가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도 금동장관모와 금장용봉문환두대도, 금동장안교, 금동장투구, 철제말투구 등은 가야고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분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자료임이 분명하다.

중요유물을 유형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장신구로는 귀걸이와 목걸이가 출토되었다. 귀걸이는 40쌍이 발견되었는데 이 가운데 순금으로 만든 수하식세환이식들은 중간식과 미식의 화려한 장식의식과 정교한 세공기술로 당시의 신라나 백제와 비견할 정도의 높은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목걸이는 이 유적의 이름이 옥전(구슬밭)인 만큼 다량의 구슬들로 만들어진 것들이 발견되었는데 유리제가 대다수이지만 그밖에도 호박, 마노를 비롯하여 최상질의 비취곡옥 등이 있으며 특히 M2호분에서는 한꺼번에 2,000여 개가 넘는 구슬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구슬들을 만들었던 사암제의 옥마지석도 발견되어 이 유적에서 구슬이 제작되었음이 명백하여졌다. 위의구(威儀具)도 다수 발견되었다. 관모는 23호분에서 발견되었는데, 금동제이기 때문에 부식이 심하지만 어느 정도 형체파악은 가능하다. 크기는 대략 너비 16cm, 높이 23cm 정도이며 맨 윗부분에 길이 10cm 가량의 금동봉이 꽂혀 있다. 형태는 외연에 복륜을 두르고 아랫부분은 문양이 없는 금동판의 대륜으로 구성된 일반적으로 내관이라 불리는 것과 거의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내륜 중앙에 금동판이 솟아 있는 것이나 투조에 의한 삼엽문을 새겨 넣은 것, 맨 윗부분의 금동봉의 존재는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유래가 없는 희귀한 자료이다.

용이나 봉황문양의 환두대도는 35호분과 M3, M4, M6호분에서 출토되었다. 이 대도는 장식의장의 화려함과 독특함 때문에 주목을 받아온 자료인데, 학술발굴조사에서 이처럼 많이 발견된 예는 처음 있는 일이다. 특히 M3호분에서는 용봉문, 단봉문, 용문장의 환두대도가 한꺼번에 4자루나 발견되었으며, 35호분에서는 다소 고졸한 상감으로 장식되어 이러한 유형의 대도의 원류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귀면문장식도자는 12호분에서 발견되었는데, 도자의 손잡이와 칼집에 장식된 금관 위에 귀신의 얼굴을 철요로 표현한 것으로, 약간 과장되게 부릅뜬 눈과 열린 코, 크게 벌린 입 등에서 완연한 귀신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이 귀면은 그 용도가 벽사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투구는 철제의 종세장방판 투구들로서 모두 13점이 발견되었는데, 복발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섞여 있으며 이 가운데에는 23호와 M3호분에서 발견된 것처럼 금동장제인 것도 2점이나 포함되어 있다. 특히 M3호분에서 발견된 투구는 지판의 형태가 종세장방판이 아니라 1점은 합천 반계제의 A호분 출토품과 같은 이른바 소찰주이며 다른 1점은 철판을 극히 장식적으로 오려서 횡으로 지판을 결합시킨 독특한 것으로서 미간부의 복륜과 수미부가리개, 지판의 고정용못, 투구 최상부에 모두 금동제를 사용함으로써 상상을 불허할 정도의 화려함을 보여주며, 거의 같은 형태의 것이 평북 태천군 용상리의 총오리산성에서 발견되어 고구려 투구와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유익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투구 지판들의 결합은 대개 가죽끈 연결의 것들인데 28호에서는 못으로 연결한다든지 70호출토품과 같이 지판의 폭이 엄청나게 넓어지는 등의 변화가 확인됨으로써 투구의 제작에 있어서 시간의 흠에 따른 단조기술의 변천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갑옷은 고분시대의 방어용무장구로서 뿐만 아니라 최고지배자의 권위의 상징물로서 채용되어 크게 각광을 받았던 것으로 11벌이나 발견되었는데, 비늘갑옷(札甲)은 전형으로의 복원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형식의 변화와 기술의 변천 등은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자료의 발견으로 고분군 영조자들이 강력한 기병군단을 소유하고 있었고, 또한 이러한 갑주문화가 고구려의 벽화고분에 많이 묘사되어 있어 그 관계를 파악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밖에 없다. 반면 28호분과 68호분에서 발견된 철판갑옷(板甲)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여 어느 정도 형태파악이 가능하다.
먼저 28호분 발견의 철판갑옷은 이른바 횡장방판정결갑옷으로서 대개 5세기 후반 대에 발견되는 일반적인 갑옷의 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68호분에서 출토된 철판갑옷은 이른바 삼각판혁철갑옷으로서 지금까지 동래 복천동 4호분에서 1령이 발견되었을 뿐 국내에서는 쉽게 출토되지 않는 아주 희소한 갑옷이다. 그리고 복천동 4호분이 대락 5세기 후반대임에 비하여 이 옥전 68호는 공반된 토기에 의하면 5세기 초로서 일본의 동형의 갑옷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위치하고 있어 향후 한일양국간의 고대갑주의 연구에 크게 기여하게 될 자료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성시구(盛矢具)는 1980년대 이후 여러 고분조사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주목되는 M3호분 출토의 성시구는 교구(·具)에까지도 은상감에 의한 화려한 장식이 확인됨으로써 옥전고분문화의 기술수준뿐만 아니라 이들 피장자의 성격을 유추하는 데 대단히 주목되는 자료의 하나가 되고 있다.

마구 또한 출토품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말투구는 동래 복천동 10호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실전용으로 그 희소성뿐만 아니라 이것이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많이 묘사되어 삼국시대 고분문화의 성격해명에 결정적인 자료임이 판명됨으로써 그 중요성이 부각된 유물 중의 하나인데 이 고분군에서는 무려 6점이나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말투구는 앞의 복천동 10호분 출토품이 국내에서본의 오타니고분과 쇼군산고분의 출토품을 합하여도 동아시아에서 세가지 예밖에 없는 귀중한 자료이며 부산 오륜대고분에서 채집된 1점을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그 수는 많지 않다. 이처럼 희소한 말투구가 이 고분에서 모두 6점이나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이 유적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M3호분에서는 형태가 판이한 말투구가 피장자의 머리와 발치쪽에 나뉘어서 2점이나 발견됨으로써 지금까지 형태차에 착안한 문화의 전파라든지 피장자의 성격규명에 많은 재고와 새로운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말투구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희귀한 자료인 말갑옷 역시 M1호분, 20호분, 28호분에서 각각 1벌씩 발견되었는데, 그 중요성은 대단하지만 현재로서는 비늘갑옷과 같이 복원이 불가능한 형편이다. 말띠드리개(행엽)와 꾸미개(운주)는 모두 금동장제로서 M2, M3호분과 같은 고총고분에서만 확인되었는데, M2호에서는 편원어미형, M3호에서는 검릉형행엽이 출토되어 형태에 의한 편년뿐만 아니라 분포권에 따른 고분문화의 연구에 많은 기여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등자는 대부분 목심철판피륜등으로서 자료가 적은 5세기대의 등자연구에 획기적인 공헌이 예상되며, 특히 M3호분에서는 철제등자도 아울러 발견되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등자의 형식변천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재갈 역시 다양한 것들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재갈멈치개가 붙은 이른바 경판비들로서 등자와 함께 마구의 형태차에 의한 편년, 나아가 고분문화의 편년과 이해에 극히 유익한 자료들임이 분명하다. 그 중 M3호분에서는 금동장의 경판들이 채용됨으로써 실용과 장식마구의 관계규명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기꽂이는 흔히 사행상철기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각 지역의 최고 수장급의 고분이 아니면 거의 부장되지 않는 유물인데 M3호분에서는 형태가 서로 다른 것이 2점 발견되었다. 최근 일본의 고분(酒卷古墳)에서 발견된 하니와(土直輪 : 고분의 위나 주위에 세워진 토기)에 의하여 이러한 철기가 기꽂이였음이 명백하게 밝혀졌으며, 아울러 동아시아에서의 고구려 문화의 전파와 영향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자료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밖에도 이 유적의 특징적인 점은 여러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관대(棺臺)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고분축조에 있어서 관대는 일반적으로 돌을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간혹 철정이나 판상철부를 관 아래에 깔아서 피장자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고 있다. 그런데 M3호분에서는 무려 130여개의 주조철부를 장방형으로 가지런히 깔아서 관대로 사용한 초유의 현상이 확인되었으며, 28호분에서는 돌로 만든 관대 위에 대도들을 좌우로 나란히 잇대어 깔아서 피장자의 부와 권위를 보여주는 특이한 현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유적에서는 다종다양한 철제품들이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철기들을 직접 생산하였던 증거물인 망치와 집게 등의 단야구(鍛冶具)가 출토됨으로써 앞서의 옥마지석과 함께 이 고분 영조자들의 생산 활동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아가 이들의 경제력 또한 부분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끝으로 부장유물 중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많은 유구에서 발견된 석구(石球)이다. 대단히 정성 들여서 둥글게 만든 석구는 우리나라의 고분에서 발견례가 드문 자료로서 충분히 주목된다. 그러나 그것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앞으로 다른 많은 유적의 조사에서 더욱 많이 발견되어 그 용도와 의미가 명확해질 것을 개대할 수밖에 없다.

이 고분군에 대한 연대와 성격은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의 조사에서 파악한 사실들을 토대로 몇 가지를 정리하면,

  • 첫째, 이 유적은 유구의 형태에 따라 Ⅰ기(목곽묘기), Ⅱ기(고총고분기)의 2시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유구의 변천은 함께 출토된 자료에 의하여 Ⅰ기는 대략 4세기대를 중심으로 5세기 중엽까지, Ⅱ기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대로 파악된다.
  • 둘째, 이 고분군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나라의 고분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최고 수장급의 무덤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대표적인 자료들이기 때문에 이 고분의 영조집단들도 어떤 가야의 지배자들임이 분명해졌다. 이럴 경우 과연 어떤 가야였을까 하는 것이 문제인데 비록 지금은 이름만 전해오는 다라국이 일찍이 선학들에 의하여 지적된 바와 같이 합천일대로 비정되어 오기 때문에 이 고분의 발견과 조사는 곧바로 국명밖에 없는 다라국의 실상을 밝히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 점은 이 유적의 인근(직선거리 0.8㎞)에 다라리라는 마을이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 셋째, 많은 출토유물 중 특히 갑주와 마구는 대다수 고구려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어서 당시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삼국의 정세와 나아가 동아시아의 판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이 이를 토대로 다라국 또는 가야사 전반에 대한 재구성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앞으로 계속 조사가 진행되어 보다 많은 자료가 확보되면 될수록 다라국의 실체파악이 보다 뚜렷해질 것이며 나아가 다라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대가야 중심의 가야후기 정치판도 및 한국고대사의 이해에 커다란 공헌이 예상된다. 출토자료의 대부분이 일본의 중기고분에서 출토되는 것과 유사하여 향후 한일고분문화의 비교연구와 이를 토대로 한 한일고대사의 재정립에 결정적인 구실을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봉산면/대병면 일대의 고분군

이 지역의 고분군들은 황강유역의 협곡과 좁은 곡저평야들을 배경으로 무리 짓고 있는데, 저포리 A·B·C·D·E지구의 고분군, 반계제의 고분군, 봉계리 고분군, 창리 고분군 등이 그것이다.

반계제 고분군

반계제 고분군 고분의 규모나 부장양상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 최상위 고분군은 반계제 고분군이다. 곡저평야를 향하여 뻗어 내린 낮은 구릉상에 2기의 다곽식봉분(동일 봉토 내에 시기가 다른 여러 유구들을 축조한 분묘 형식)과 주변을 에워싸는 형태로 분포하는 소형 석곽묘 33기가 있다. A호분은 수혈식 석곽 2기(주곽,부곽)가 축조되어 있다. 여기서 출토된 방형판혁찰주(方形板革札·)는 중국 집안에 있는 고구려 삼실총 벽화의 무인상에 나타나고 있는 투구와 같은 형식이다. 반계제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형식은 고령지역의 대가야토기에 속하며 대체로 6세기 전반기에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반계제 고분군은 고령지역의 대가야연맹의 성립과 그 세력의 확장으로 형성된 대가야문화권에 속하며, 대가야연맹체 내에서 일시적으로 황강의 협곡지대를 관장했던 수장이 남긴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저포리 고분군

황강의 한 지류인 논덕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대규모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다. 강덕산의 줄기를 배경으로 뻗어 내린 지맥마다 고분군이 입지한다.
이 중 저포리 A지구는 3세기 까지 연대가 올라가며 이로 인해 황강유역의 협곡지대와 같은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도 삼한시대에 작은 규모의 정치집단이 존재했음은 분명해졌다. 삼한시대에는 회색연질의 항아리와 함께 쇠도끼·쇠낫·손칼 등의 농공구류, 철촉, 철모, 고리자루큰칼 등의 무기류가 출토된다. 가야초기에도 이와 유사한 유물 부장양상을 보이지만 색다른 점은 토기에 있어서 기종의 다양화가 진행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저포리 C지구 주거지 유적은 강변의 구릉지대에 위치한 삼한·가야초기의 취락지로서 드물게 발굴조사된 유적이다. 이 주거지 바닥에서 다량의 곡물이 출토되었는데, 쌀·보리·조·콩·팥·녹두·수수 등 다양한 잡곡류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3세기 후반이 되면 그와 같은 곡물이 황강유역의 협곡지대와 같은 환경에서도 재배되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저포리 E지구 고분군

저포리 C·D·E지구의 고분군은 대체로 6세기대에 해당되며 합천지역이 가야연맹의 일원이었다가 6세기 중엽 경 신라의 정복으로 그 아래 편입되었던 시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유물상으로도 대가야식 유물에서 신라식 유물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저포리 C·D·E지구의 고분들은 가야연맹 말기에 백군지역으로부터 횡혈식 석실분이 도입되고 신라에 의해 정복되면서 신라식 토기가 들어오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부사리리'명 토기

특히 저포리 E지구 4호분에서 출토된 단경호에 새겨진「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라는 다섯 글자는 가야의 문자로서는 희귀한 예라 할 수 있다. 하부(下部)라는 것은 지방행정구획의 성격을 가지는 부명(部名)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부의 사리리(思利利)라는 도자기 만드는 이가 제작자를 명기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하부 위의 상부나 중부를 상정할 수 있으므로 적어도 6세기 전반대의 대가야는 지역적으로 분화된 의사결정 위계를 가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봉계리 고분군과 창리 고분군

봉계리 고분군창리고분군

이 양 고분군은 규모와 부장양상에서 유사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으며 당시 고대사회에서의 서민층의 고분군이라 할 수 있다. 봉계리 고분군이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대를 걸치고 창리 고분군이 6세기 대에 해당하므로 황강유역에서 하위분묘군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봉계리 고분군에 석곽묘가 도입되면서 다곽식의 묘역을 형성하게 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출토유물은 토기와 쇠낫, 손칼, 쇠도끼 등에 국한되는 하위 분묘군이다.

저포리 C·D·E지구의 고분군들이 6~7세기에 해당하는 상위 고분군이라면 그 하위 고분군에 해당되는 것이 창리 고분군이다. 고분의 규모나 부장유물의 양에서 창리 고분군은 저포리 C·D·E지구의 고분군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저포리 고분군에서도 고분들 사이의 등급이 있듯이 창리 고분군에서도 차별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창리 고분군이나 저포리 고분군 사이의 비교는 당시 사회집단들 사이의 관계성이나 사회집단들 내의 관계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삼가면 일대의 고분군

삼가면 삼가고분군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합천군에 속하지만 삼가면은 황강유역이 만들어낸 합천의 분지와는 격리된 별도의 분지를 구성하고 있다. 삼가면 소재지와 인접한 일부리와 양전리 일대에 대형 봉토분 군집과 이른 시기의 분묘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 이들 봉토분들은 다곽식 고분인데, 매장주체부는 수혈식 석곽과 횡구 혹은 횡혈식 석실분들이다.
이들 유구들은 전후 양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앞선 시기 즉 6세기 중엽이전에는 대가야식의 토기가 출토되고 석곽묘가 주가 되며, 6세기 중엽이후에는 횡혈식 석실이 위주가 되고 신라식 고배와 장경호가 반출된다.

1981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삼가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봉토분 9기를 수습 조사한 것에 불과해 고분군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2009년 10월부터 2011년 3월까지 실시된 발굴조사에서는 삼가고분군의 성격과 위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삼가고분군의 범위는 가라국의 유적인 고령 지산리 고분군, 안라국의 유적인 함안 도항리·말산리 고분군과 비교해보아도 손색이 없는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또 삼한시대 널무덤은 경남 서부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것으로 고고학계에서 거의 공백지대로 남아있는 경남 서부지역을 역사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덧널무덤의 경우에 Ⅰ지구 1호 무덤은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을 별도로 만든 형태인데 경남 서부지역에서는 최초로 확인된 것이다. 또 Ⅱ지구 8호 무덤은 길이가 7m에 이르는 대형 무덤으로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덧널무덤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봉토분은 삼국시대 가야 수장층의 묘로서 일반적인 가야 고분의 경우에는 직경 20m 내외이지만 삼가고분군의 경우 직경 30~40m에 달하는 것이 많고 전체 봉토분의 수는 500기 이상이나 된다.

유물은 4~6세기 대 각종 생활용 토기는 물론 당시의 최첨단 전술체제를 상징하는 재갈, 발걸이 등의 기마용 말갖춤새가 많이 출토되었으며 세잎고리자루큰칼 등 최고 수장의 존재를 나타내는 장식 큰칼도 출토되어 삼가고분군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고분에서는 경남서남부지역양식 토기를 중심으로 고령·합천식, 함안식, 신라식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삼가지역에 있던 가야세력이 백제나 서부가야에서 동부가야, 신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자리 잡고 있어 교역의 거점으로 성장했음을 증명한다.

삼가고분군을 조성한 세력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 10국 가운데 하나의 국가로 추정되며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하여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또 하나의 가야왕국의 면모를 제대로 밝힐 필요가 있다. 이 고분군이 다라국을 제외한 임나 10국 가운데 하나의 국가가 축조한 지배자 무덤으로 밝혀진다면 합천은 적어도 두 개의 가야왕국이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현재까지 발굴 조사된 내용만 보아도 다라국의 지배자무덤인 옥전고분군과는 유물의 성격이나 무덤의 형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가야 각국의 독자적인 특성을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동안 기록이 제대로 전하지 않아 그 실상이 분명하지 않았던 가야에 대하여 우리가 아직까지 알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나 많은 상태임을 삼가고분군의 발굴 조사를 통해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